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해 알아봅시다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장보고는 해신으로도 불리는 사람인데요.

당시 굉장히 폐쇄적인 사회였던 신라의

계급 체계를 평민 출신으로 뒤흔들었던

그의 삶과 청해진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역대 신라인 중 진골출신이 아니면서 진골의

대우를 받은 사람은 김유신과 장보고 단 2명뿐이

없었습니다.

 


장보고가 태어났던 8세기~9세기는 신라가 왕위 쟁탈전

때문에 혼란했던 시기입니다.

100년 동안 왕이 10명이상이 바뀔 정도 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심했는데요

신라 백성들이 구걸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당으로 단체로 건너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가뭄이나 지진 등 당시 자연재해도 많이 일어

났다고 합니다.


 

장보고의 어렸을 때 이름은 궁복, 궁파, 활보 3개로

불리어집니다. 모두 활을 잘 쏴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출신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당으로 건너가 외국인 용병부대

무령군에 20살 정도에 입대 합니다.

거기서 봉급을 받으려면 이름이 있어야 해서

장보고라고 본인이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이사도의 난이 일어난 지역과 무령군의

위치는 위의 지도에 나타납니다.

815년 평로지청 이사도의 난이 일어나는데요.

장보고가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서

10년 만에 무령군 소장(대위~소령급)으로 임명됩니다.

평로지청 이사도의 난 진압 이후 무령군은 재정이

계속 들어가니까 정리해고를 하게 됩니다.

그 때 장보고도 무령군에서 나옵니다.

 

그러고선 장보고는 청해진을 만들기 위해 사업구상을

하고 준비 작업을 합니다.

거기에 따른 기록으로는 아래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내용입니다.

장 대사가 천장 원년(842)에 일본국에 도착했다가…….

일본어를 해득하기 때문에 곧 통역사로 삼았다.“‘

위의 내용은 장보고가 일본에서 통역사를 구했다는 말이고요

‘828년 신당서 동이전 신라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서 왕을 알현하고 이르기를

중국에 두루 걸쳐 보니“‘라는 문장이 나온다고

합니다.

일본 통역사 고용 + 중국 순방은 아마 장보고가 청해진을

만들기 위해 알아보러 다닌 흔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당 한국 일본의 3나라 역사책에 기록이

남는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위의 빨간색 원 안 지역에 신라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당시 당에는 신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요.

내륙족은 당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까 해안가 쪽에

신라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라방(당의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관리기관), 신라원

(사찰, 한인교회같은 신라인들의 구심점역할)이 있었습니다.

당시 재당 신라인은 다양한 외국어 구사가 가능했어 서

이런 신라 사람들이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왜 무역을 독점하는데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장보고의 세력권은 당의 산둥반도 해안과 한반도

서남 해안, 일본의 하카타지역입니다.

이 지역들의 해적들을 소통하고 해상 무역 중개를

기본으로 하였으며 바다 관련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장보고의 해상 무역 성공 포인트는 아래입니다.

1. 사업가로서의 동물적 감각입니다.

2. 각국에서 얻은 견문입니다.

 

10년이 넘은 준비기간후 장보고는 신라왕인 흥덕왕(42)

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왕과 면담한 후 신라서남지역의 해적들을 소탕할

것과 세금을 직접적으로 왕실이 가져갈 것을 제안으로

해상 중개 무역소 청해진 설치를 허가 받습니다.

당시는 국가 간 해외무역만 가능하고 사적인 해외무역은

금지 하던 시기라 해상 국제 무역을 하기 위해선 왕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청해진 설치를 허가받은 장보고는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며 해상 중개

무역을 독점합니다.

 


위의 지역이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 기록에 보면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인을 노예로 파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 업무는 아래입니다.

1. 무역 업무는 기본이고요

2. 신라와 당 일본 공식 사절단 호송 활동

3. 여객 운송 활동

4. 배의 건조와 수리역할을 함

5. 한중일 통역 활동

6. 바다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합니다.

 

청해진이 완도에 있었는데요. 완도의 지리적 이점은

아래입니다.

1. 삼면이 바다로 해상 교통의 요지입니다.

2. 수심이 깊어 정박이 편리합니다.

3. 주변에 섬이 많아서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4. 당과 일본 중간에 있습니다.

 

당에선 신라로 서적, , 비단, 에메랄드 향료, 모직물

등이 수입되었습니다.

 

신라 전역에 사치품이 많아지게 되자 흥덕왕은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이유로 사치품 금지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계급별로 사용할 수 있는 사치품을 정하기도

합니다.

 

흥덕왕 사후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데요.

837년 장보고는 김우징을 돕고 김우징이 왕이 되도록

도와 성공합니다. 청해진 설치를 위해 흥덕왕을 만날 때

실세가 김우징이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감 때문에 김우징이 왕이 되는 것이

맞다고 장보고는 판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우징의 왕위 쟁탈전이 838년에 일어나자 자기의

군사 5천명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은 신무왕과 문성왕을 상상해서 그려본

그림입니다. 위가 신무왕, 아래가 문성왕입니다.

김우징(신무왕)은 왕으로 직위하고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000호를 하사하였습니다. 2,000호에게

세금뿐만 아니라 노동력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 때는 진해장군이라는 호칭을

주는데요. 장군이라는 호칭은 진골이상만 가질 수 있는

호칭인데 그런 호칭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고

했는데요(8453)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이 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8년 기록에 보면

청해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라 왕실은 장보고를 함부로 못했는데요.

염장과 손을 잡고 염장이 장보고를 찾아가 같이 술을

먹다가 칼로 죽입니다.(846)

 

장보고가 죽은 후 신라 왕실은 염장에게 청해진을

맡기는데요. 청해진내의 세력이나 완도 분들의 저항에 부딪

혀 제대로 운영이 안 되다가 결국 청해진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 후 왕건, 나주 오 씨 집안, 왕봉규, 이언모, 박윤웅같은

군소 해상 무역 세력들이 무역을 하는데요.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통폐합이 됩니다.

장보고는 지방 호족 세력의 선도적 인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폐쇄적이고 견고했던 고대 신라사회를 흔들고

중세 사회로 가게 만들어 논 인물로도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상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드라마 해신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요. 장보고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전쟁과 무역을 하는 게임소재로도 괜찮을 것 같네요

 

한민족을 중세시대로 이끌어주신 장보고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