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의 진실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대한민국국민이면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부터 원효대사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원효대사 그림과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실 때 이동경로였던 당나라로 가는 루트입니다.
당시 원효대사는 의상스님과 함께 7세기에 당으로
유학을 위해 이동 중에 계셨습니다.
비가 쏟아져서 동굴 안으로 피신하고 주무셨는데요.
날이 밝고 보니 그 동굴은 무덤이었고 밤에 맛있게 먹었던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원효대사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일체유심조) 깨달으시고 그냥
신라로 돌아오십니다. 의상스님 혼자 당나라로 유학길을
가십니다.
화엄연기라는 일본 국보 그림이 있는데요.
원효대사와 의상의 행적을 담은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진
그림입니다.(13세기 초) 일본 승려이신 묘에가 지었다고
하는데요.
거기에는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는 그림은 없고요
주무시면서 요괴들에게 시달리는 그림만 있습니다.
위의 그림인데요. 일본은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안하고 동굴인지 알고 들어간 곳인
무덤에서 주무신 다음 일어나서 보니 무덤인지 알았는데요.
비바람이 심해 하루 거기서 더 자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덤인지 몰랐을 때는 괜찮았는데
무덤인지 알았을 때는 밤새 귀신이
쳐다보는 것 같은 악몽에 시달리셨다고 합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드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200년 후인 12세기에 당나라 혜홍이 저술한 임간록에만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해골물을 마셨다는 것이 조금 더 쇼킹해서
파급력이 있는 이야기로 미화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후
대중을 교화하며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귀족 불교적이었어 서 일반인들이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한문도 알아야 했고요
진입장벽이 있어 같이 극락왕생하고 싶은 일반인들은
믿고 싶어도 못 믿었는데요.
원효대사는 이 귀족불교 틀을 깨고 일반인들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알고 착하게 행동하며 노력하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설교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의 뜻은 나무가 XX에게 귀의한다란
뜻이고요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의 여러 부처 중에 하나인데
과거에는 보살이었으나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부처가
된 분이라고 합니다.
송고승전이란 책에는 아래와 같이 원효대사를 기술 합니다.
“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며 여염집에서
유숙을 하기도 했다.“
위의 기록같이 원효대사는 파격적으로 행동하며
대중들을 이끌어 일반 민중들에게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여수 향일암, 남해 보리암에 가시면 원효대사의 흔적들이
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그리고 밑에 그림은
설총 초상화입니다.
그러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스캔들이 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데요. 그 아이가 설총이라는 분입니다.
요석공주는 요석이라는 성의 공주라서 요석공주라고
이름지어진거고요 김춘추(신라 무열왕)의 딸이라고 합니다.
당시 스님 중에는 똑똑하지만 스님이라 왕이 고용하지
못한 분들도 계신데요. 그럴 때 왕은 그 스님을 여자와
자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파계시킨 후 고용하기도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원효대사를 직접고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식을 낳게 하여 그 자식을 고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는 삼국유사에서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설총이 원효대사 아들인 것은 맞다고 합니다.
족보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합니다.
설총은 신라 최치원과 함께 10대 현인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신라 35대왕인 경덕왕 때 문신으로 있었고요
이두를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이상 원효대사와 해골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원효대사님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믿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