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헌창의 난은 822년 통일신라 헌덕왕 14에 옛 백제지역에서
일어났는데요. 중고교나 공무원 시험 등에 자주 나오는 사항
이라고 합니다.
이런 김헌창의 난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얼굴은 김헌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고요
밑에 통일신라 지도는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이 점령
했던 지역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빨간색 원 안이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이 점령한 지역
인데요. 신라 지방체계가 9주 5소경인데 그중 5주 3소경을
점령 했습니다. 통일신라의 반이 김헌창의 난에 합류한
것입니다.
김헌창의 난은 저 중 웅천주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아래는 김헌창의 난 관련 문제를 보겠습니다.
○ 신라 후기의 여러 가지 반란 사건 중 무열왕 직계손인
김주원이 왕위 계승을 이루지 못하고 영주(강릉)로 퇴거
한 후 그 후손들이 일으킨 사건은?
답: 김헌창의 난과 범문의 난입니다.
김범문은 김헌창의 아들인데요. 김헌창의 난 때 살아남아서
3년 후인 825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호응도 별로
없었고 실패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길에 물이 불어난 모습과 원성완관련
사진입니다.
김헌창의 아버지는 김주원인데요 785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김주원이 왕의 후보 1순위가 됩니다.
김주원은 그 때 궁으로 가는데요.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범람해 궁으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안 귀족들이 이것은 김주원이 왕 되는 것을
하늘이 반대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김주원은 왕이
되지 못합니다.
그 후 김주원은 정계를 떠나 남은 생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아래는 관련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여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고 싶지 않음이 아닐까?‘
그래서 왕이 된 사람이 김경신(원성왕)인데요
다른 내용의 기록도 있습니다.
아래는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상대등 경신(원성왕)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김경신이 무력으로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 김주원은 정계를 은퇴하고 그의 아들인 김헌창이
벼슬을 하는데요. 머물렀던 벼슬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807년(애장왕 8) : 시중
813년(헌덕왕 5) : 무진주(광주광역시) 도독
814년 (헌덕왕 6) : 시중
816년(헌덕왕 8) : 청주(경상남도 진주) 도독
821년(헌덕왕 13) : 웅천주 도독
위의 빨간색원은 김창원이 도독으로 있던 곳의
위치인데요. 웅진주와 무진주는 빈곤이 특히 심했던 곳이라
김헌창은 백성들의 민생고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중은 지금의 국무총리급이고 도독은 도지사정도인데요
국무총리 하던 사람을 도지사로 돌리고 있는 상황인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누가 봐도 좌천성 인사인데요.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이유는
1. 계속되는 좌천성 인사
2. 아버지가 부당하게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삼국사기 기록)
3. 헌덕왕의 불법적 왕의 찬탈(헌덕왕은 조카(애장왕)를 죽이고
왕이 된 인물)
4. 이것은 추측이지만 당시 많은 통일 신라인들이 김헌창의 난에
동조 한 것으로 보아 참혹한 민생고를 극복하고 하는 김헌창의
의지입니다. (신라는 당시 자연재해가 계속 돼었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극심하여 귀족들은 엄청난 재물을 계속 불리고 있었지만
일반 평민들은 여자 아이를 죽여서 재물로 바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김헌창은 태종무열왕계인데요 선덕왕이나 원성왕은 내물왕계
입니다. 김헌창은 난을 일으키면 중앙 귀족으로 있는 태종무열왕계
출신들이 동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김헌창의 난이 실패함에
따라 그 후 태종무열왕계는 왕위 쟁탈전에서 밀리는 영향이
생겼습니다.
위의 사진은 민생고를 나타내는 사진과 삼년산성
모습입니다.
김헌창의 난이 다른 난들과 다른 점은 왕위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나라로 새운 것입니다.
국호는 장안이고 연호는 경운이라고 했는데요.
나라를 아예 새롭게 세운것으로 보아 신라를 리셋하고
새로운 세상을 살겠다는 의지가 보여 백성들의 민생고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통일신라는 100년 동안 전쟁이 없어서 군대가 느슨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요
통일신라의 중앙군은 의외로 빠르고 치밀하게 움직여 김헌창의 난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김헌창의 난 아주 이른 초기 때부터 밀고자가
있어 김헌창의 난 상황을 중앙귀족들이 알고 있었고요
김헌창의 난 군인들은 지방군인데 당시는 중앙군과 지방군
전투력 차이가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투력이 높은 중앙군이 더 우세해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삼년산성이라고 그 성을 지키는데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곳이 있는데요. 김헌창의 난 반란군이 삼년산성을 지키면서
최초로 방어하는데 실패했다고 할 정도로 쉽게 김헌창의 난
반란군은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역사는 특히 더 승자기준으로 써져서 실질적으로
싸움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에는 중앙군이
김헌창의 난 반란군을 쉽게 진압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후 김헌창은 웅천성을 지키다가 패배를 예감하고 자살합니다.
그래서 그 유해는 김헌창 부하들이 머리와 몸통으로 나눠서 따로
묻는데요. 결국 통일신라 중앙군이 다 찾아내 유해에 다시 해를
가합니다.
그리고 김헌창 가문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무리 239명도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김헌창의 난 관련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이상과 힘은 중요도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이상만으로는 힘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힘도 그 이상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