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에 대해 알아봅시다

인조반정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의 총지휘 아래 능양군이 인조라는 왕이 되게 일어난 쿠데타입니다. 그래서 능양군은 인조라는 왕이 되었습니다. 반정이란 말은 중국 춘추 공양 전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쿠테타에 성공하면 반정이라고 할 수 있고요, 쿠테타에 실패하면 반란 혹은 역모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공한 쿠데타인 반정이란 말과 능양군이 인조라는 왕이 됐다는 말이 합쳐져 인조반정이라고 부릅니다.

 

 

위의 그래프는 인조반정 을 일으키고 광해군의 죄라고 주장한 것들을 카테고리로 비율을 정리한 것입니다.

반정은 1506년 연산군을 폐위한 중종반정이 1번 일어났고요. 그다음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이 2번째 일어난 것입니다. 위의 두 반정이 외에 정조시대에 문체반정이 1번 더 있습니다. 문체반정은 왕을 바꾼 사건은 아니고 정조가 당시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체를 바로잡기 위해 정조가 일으킨 정책입니다. 요즘에 외계어가 유행해서 국어의 훼손이라는 이유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이 발생한 것처럼 정조시대 문인들의 문체를 정조가 바로 잡으려고 일으킨 것입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능양군입니다. 능양군은 실제로 인조반정 이후에 직접 인조라는 왕이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능양군은 1595년 ~ 1649년이고요. 할아버지가 선조이고, 할머니는 인빈 김씨입니다. 아버지는 정원군(원종)이고, 큰아버지가 광해군입니다.

 

능양군 성격은 말 수가 적고 조용했다고 합니다. 인조(=능양군) 곁에서 일하는 궁녀들이 하루 종일 인조 곁에서 일해도 말하는 것을 별로 못 봤다고 합니다. 특이사항으로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어린시절 왕실에서 자랐습니다. 오른쪽 허벅지에 다수의 사마귀가 있습니다.

 

광해군 7년 기묘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능양군(=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 집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소문이 돈 것입니다. 그 무렵 능양군(=인조)의 동생이 역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요. 광해군은 왕기가 서렸다는 능양군 아버지 집을 철거하고, 그 터에 궁궐을 짓습니다. 졸지에 아들을 잃고 집도 잃은 능양군 아버지는 술로 시름을 달래다 숨을 거둡니다.

 

능양군(=인조)은 이렇게 광해군 때문에 동생과 아버지를 졸지에 잃었는데요. 그래서 능양군이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많이 안 좋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인조반정 이 일어난 한 이유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조반정 은 1623년 3월 12일 이루어졌습니다. 인조반정 가담자들은 3월 12일 밤 10시에 한양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에서 집결하였습니다. 원래 약속은 밤 10시인데 대장인 김류나 이서 같은 중요 인물들이 좀 늦게 왔습니다. 총 인원은 1,300여 명입니다. 1,300여 명 중 절반은 길거리에서 고용한 용역 같은 사람들이고, 나머지 700여명 병사들은 장단부사 이서가 이끄는 정규군이었습니다. 정규군은 호랑이 잡는다는 핑계로 거기까지 온 것입니다.

 

세금정에서 같이 물로 칼을 씻으며 결의를 함께 다지고 밤 12시경에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는데요. 돈화문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1000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는데요. 훈련 도장 이흥립과 반정세력들과 사전 물밑 소통이 있어서 훈련도감 병력이 창경궁 문을 그냥 열어줍니다.

 

 

당시 광해군도 반란군이 창경궁에 쳐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시의 등에 업혀서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을 가는데요. 안국신 집에 있던 의관 정남수라는 사람이 이를 보고 인조반정 세력에게 고변해서 광해군은 인조반정 세력에 잡힙니다.

 

인조반정 이 성공한 후 반정 교서라고 해서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유, 혹은 광해군의 죄목 36가지를 나열했는데요. 그것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교정책 관련 43%, 폐모살제 31%, 대북 세력 전횡 14%. 토목공사 10%, 기타 2%입니다.

 

외교정책은 신하들은 명나라에 사대를 하며 충성하자고 주장했는데요,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추구해서 후금과도 교류를 하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광해군과 신하들 간 충돌이 커서, 나중에는 레임덕처럼 성에서 업무가 제대로 안 돌아갈 정도로 광해군과 신하들 간 갈등이 컸습니다.

 

폐모살제는 광해군이 이복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것입니다.

 

인조반정 당시 주모자인 이귀와 김자점 이름이 거론되며 역모를 일으킨다고 상소가 계속 광해군에게 올라갔습니다. 인조반정 당일날도 역모 일으킨다는 상소가 광해군에게 올라왔는데요. 상궁이었던 김개시가 역모 관련 고변은 거짓이라고 광해군 옆에서 교란을 시켜 광해군이 역모 관련 고변들을 믿지 않고 대응도 안 했습니다. 김개시는 인조반정 세력들과 교감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반정 성공 후 김개시는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반정 세력에게 숙청당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성공 후 인조는 광해군을 죽이지 말라고, 인조 아내인 인열왕후가 간곡히 주장하여 광해군은 죽지 않고 강화도로 귀향을 가고 거기서 18년간 평생 살았습니다.(광해군 왕 재임기간은 15년) 인열왕후가 광해군 죽음을 막은 이유는 인조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광해군을 살리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국방, 외교, 과학분야에는 좋은 자질을 보였는데요. 한민족 입장에서는 아쉬운 사건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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