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에 대해 알아봅시다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60년대 수많은 한국인분이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을 가서 외화를 벌어왔습니다. 광부분들은 독일 뒤스부르크 지역으로 가셔서 일하셨는데요. 뒤스부르크 지역이 독일 내에서도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뒤스부르크 지역의 함보른 탄광에 가셨습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뒤스부르크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1963년 1인당 국민소득이 가나가 200달러, 필리핀이 190달러일 때 한국은 120달러였습니다. 그 당시는 돈을 벌기 위하여 헌혈을 하여 피를 팔았고요. 머리를 잘라 팔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독일에 가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니까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을 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77년까지 18,000여 명의 젊은이가 돈을 벌기 위해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왜 서독으로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떠났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았는데요. 1958년부터 이것이 바뀝니다. 미국은 한국에 무상원조가 아니라 차관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원조 방식이 바뀝니다. 그렇다고 그냥 빌려주는 것은 아니고요. 돈을 갚을 계획이 똑바로 있어야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가 계획을 만들었는데 미국이 보기에는 그 계획 가지고 돈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국 정부가 돈을 안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1963년에는 한국의 외화보유액이 1억 달러 밑으로 떨어집니다. 어디서든 달러 차관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는데요. 그때 박정희 정부가 주목한 것이 서독입니다.

 

1960년대는 서독이 산업발달(라인강의 기적)을 위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포루투칼, 스페인, 이탈리아, 터키 등에서 정말 많은 인력이 서독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왔냐면 이벤트로 100만 명째 입국노동자에게 오토바이를 선물해줄 정도였습니다.

 

1963년 8월 1차 독일 광부를 190여 명 모집했는데요. 2,895명이 지원을 합니다. 경쟁률이 15대 1 정도 됐습니다. 합격자 중 73%가 고졸 이상이었습니다. 서울 법대 출신도 있었고, 교사 출신도 있었고, 경찰도 있었고, 장관 보좌관 출신도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독일에 간 한국인 광부가 일하는 모습입니다.

독일 광부 월급은 160달러 정도였는데요. 당시 한국 돈으로 5~6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9급 공무원 월급이 4천 원이었는데요. 9급 공무원보다 10~15배 높은 월급이었습니다.

 

독일 광부는 20~35살까지만 지원 가능했습니다. 지원자는 60kg 모래가마니 들기, 달리기, 역기 들기, 턱걸이로 체력시험을 거쳐 파독 광부를 선발했습니다.

 

 

독일 광부들은 탄광에서 매일 60kg이 넘는 동발이라는 쇠기둥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60kg 모래주머니를 들게 시킨 것이었습니다.

 

지하 천 미터를 내려가면 지열 온도 때문에 35도 이상이 됩니다. 거기서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힘든 높이의 굴 안에서 곡괭이질을 해야 하는데요. 석탄가루도 날리고요. 힘들게 작업하셨습니다.

 

독일 광부들이 탄광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한 말은 글뤽아우프(Glu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었습니다.

 

글뤽아우프라는 말은 16세기 광부들을 위해 탄생한 말입니다.

 

독일 광부 중 26명이 작업 도중 사망하셨고, 질병으로 17명이 사망하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독일에 파견한 한국 간호사가 일하는 모습입니다.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중 간호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당시 파견한 간호사가 하던 일은 환자 옮기기, 씻기기, 배변처리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요양보호사가 하던 일을 한국 간호사들이 했습니다.

 

남자 같은 경우는 몸무게가 70~100kg 정도 되는데 그것을 여자간호사들이 들고, 옮기고, 배변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중노동이었습니다.

 

1966년 독일 간호사 월급은 최고 800마르크(우리 돈 약 65,000원) 정도였는데요. 당시 한국 장관 월급이 52,490원이었는데요. 장관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독일 간호사로 1년 반 정도 일해서 70만 원 정도 되는 서울 미아리 주택을 산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가신 분들이 성실하게 일하셔서 독일에서는 한국인 이미지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Korea Lotus-Blume(한국에서 온 연꽃)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하셨던 분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이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1963년~1975년까지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 하신 분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이 1억 137만 달러입니다. 순수하게 노동을 통해 번 돈이라 재료비 같은 것이 들지 않아 상품 수출액의 1.66배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까 1965년 해외 개발 공사를 설립합니다. 그래서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 남미 이런 해외로 사람을 노동자로 보냅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 계신 많은 교포가 저시기에 나가셨던 분이 많습니다.

 

이상 독일 광부 간호사 파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1960~1970년대에 독일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중동으로도 노동자로 파견 많이 가셨습니다. 거기서 번 외화가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요. 후손들을 위해 고생해 주신 부모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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