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 23일 ~ 1943년 2월 2일에 소련의 스탈린 그라드란 도시(현재 볼고 그라드)에서 일어난 독일과 소련의 163일간 전투입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의 배경이 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무려 2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옵니다. 우리나라 대구광역시 인구가 230만 정도인데요. 우리나라의 대구광역시 인구 전체 정도의 숫자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입니다.

 

 

위의 그림처럼 독소전쟁 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때 3개 그룹으로 나눠서 공격하는데요. 레닌드라드로 한 그룹 보내고, 모스크바로 한 그룹 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탈린 그라드로도 한 그룹의 군대를 보냅니다.

 

 

히틀러가 스탈린 그라드를 공격한 이유는 스탈린이란 이름이 들어가서이기도 하고요. 스탈린 그라드 동남쪽에 바쿠란 도시에 유전이 있습니다. 소련이 전쟁을 하려면 석유가 있어야 했는데요. 이 석유를 소련에 공급할 수 없게 함과 동시에, 자기가 이 유전을 장악하여 석유를 가지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또 스탈린 그라드는 볼가강 끝에 있어서 모스크바 남부 자원지대를 이어주는 수운의 요충지입니다.

 

스탈린 그라드가 이름이 저런 이유는 스탈린이 러시아 내전 때 반혁명 군에게서 이 도시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래서 1925년 자기의 이름을 따 스탈린 그라드라고 지은 것입니다.

 

1942년 8월 23일 600대의 독일 폭격기가 스탈린 그라드 도시 전체를 융단폭격합니다. 이 정도면 하늘이 시꺼먼 것이고요. 그 까만 것에서 점 같은 게 막 떨어지는 게 보이는 겁니다. 그 검은 게 가까이 와 크게 보이면 그 미사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스탈린 그라드의 주민 수는 60만 명이었는데요. 확성기에서 공습을 늦게 알려줘서 4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주민들은 볼가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도망가려고 했는데요. 스탈린이 도망을 못 가게 막았습니다. 1942년 7월 28일 스탈린 내린 명령 227호가 있는데요. 명령 내용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입니다.

 

소련군이 독일군의 압박을 받으면서 공황 상태가 되는데요. 스탈린은 저지부대 란 것을 만들어서 일반 군대의 제일 뒤쪽에 배치합니다. 그래서 일반 군대 병사가 도망치려고 하거나, 머뭇거리면 이 저지부대 병사들이 죽여서 일반 군대의 후퇴를 막았습니다.

 

저지부대 말고 형별부대란 것도 있었는데요. 탈영병, 범죄자를 모아서 만든 부대입니다. 이 부대에게는 많은 희생이 날 수밖에 없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지뢰 제거, 공격 최일선 배치 같은 것인데요. 죽던지, 전투에서 살아남든지 이 2개만 선택할 수 있는 형벌부대를 운영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독일군은 초반에 엄청난 융단폭격을 해서 스탈린 그라드의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길도 많이 망가지고, 장애물도 많이 생겼는데요. 그래서 독일의 자랑인 전차부대가 전진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보병이 전진했는데요.

 

이때 소련군은 도시 곳곳에서 소규모로 부대를 운영하면서 시가전을 했습니다. 너무 붙어서 싸우니까 총도 쓰지만, 야삽으로 서로 찍는 행동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어 칼은 데미지를 많이 입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삽을 갈아서 사용했습니다.

 

양측의 시가전으로 스탈린 그라드는 거대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같은 건물인데 2층은 독일군 점령, 3층은 소련군 점령, 4층은 다시 독일군 점령을 하는 일도 일어나고요. 벽 건너편에 적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소련의 전설로 바실리 자이체프라는 저격수가 떠오르는데요.

 

 

위의 분이 소련군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1915 ~ 1991년)의 모습입니다. 이분이 공식적으로 독일군 225명을 사살했다고 하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사망한 적의 숫자와 발사한 총알의 숫자가 1발 차이 났다고 합니다.

 

독일은 보통 남성들만 군인이고 여성은 후방에 있는데요. 소련은 남성 여성 할 거 없이 다 군복 입고 싸웠다고 합니다. 아래는 독일 병사의 증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스탈린 그라드에서 손과 발이 여전히 붙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전투에 나선다. 그들은 정말 개처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이 전투에 투입되면 살아있는 평균 시간이 24시간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련군이 이렇게 처절하게 싸웠던 이유는 형벌부대나, 정치적인 세뇌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소련에서 징집된 대부분의 사람은 농민들인데요. 자신의 땅, 혹은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일군에 맞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라고 명령 227호를 보냈을 때 장병들이 아래와 같이 회답합니다.

“우리에게 볼가강 뒤에는 땅이 없다.”

 

당시는 시가전이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이 처음엔 시가전에 애를 먹지만, 나중에 익숙해지고부터 독일군이 치고 들어갑니다. 스탈린 그라드의 90%까지 독일군이 점령합니다.

 

 

위의 사진이 리하르트 조르게 모습입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소련 기자로 위장한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중요한 첩보를 소련에 넘기는데요. 그것은 바로 일본의 군대가 시베리아 쪽으로 진격 안 하고 태평양 남부로 진격할 계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소련의 동쪽에 있던 부대들 몇 개 사단(100만명)이 스탈린 그라드로 진격해 옵니다.

 

1942년 11월 초 스탈린 그라드에서 100km 넘는 지역에서 소련군 100만 명이 조용히 집결합니다.

 

1942년 11월 19일 새벽 수천 개의 대포가 불을 뿜으며 소련의 대반격이 시작됩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북서쪽을 방어하던 루마니아군은 붕괴합니다. 남동쪽에서 진격한 작전도 성공했습니다. 작전 개시 4일 후 남북에서 진격하던 두 병력은 만납니다. 스탈린 그라드 안 독일군 30만 명이 순식간에 포위되었습니다. 이것을 천왕성 작전이라고 합니다. 스탈린 전투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 그라드를 포위 완성하느냐 두 집단의 군대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실제 모습은 아니고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동맹이라 미국이 소련군에 전략물자를 보급해 줬는데요. 스팸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주기도 하고, 트럭과 지프 차량 40만 대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가전이라 조용히 먹는 게 중요했는데요. 초콜릿은 그냥 껍데기 까고 먹으면 되는 것이라 시가전에 유용했다고 합니다. 스팸은 겨울이라 다 얼어서 먹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소련의 무기인 카츄샤 다연장로켓포입니다. 별명은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합니다. 발사할 때 맑은 쇠 파이프 소리 혹은 오르간 소리 같은 것이 나는데요. 그래서 소리 때문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립니다.

 

저 카츄사 다연장로켓포가 화력이 좋긴 한데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때 미국이 트럭이나 지프 40만 대를 지원해 줘 거기에 싣고 다니면서 유용하게 잘 이용했습니다.

 

미국이 무전기도 지원해 줘 소련 탱크들이 무선 통신을 할 수 있어 전략적으로 잘 운영하게도 해줬습니다. 당시 이 정도 무선 통신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은 미국과 독일 정도만이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이런 소련 지원은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기는 데 결정적 요인은 아니고, 중대한 역할은 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당시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 최고 사령관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입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몇 번이나 히틀러에게 후퇴해도 되냐고 물어봤지만, 히틀러는 절대 후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별 5개로 진급 시키면서 “지금까지 독일 제국의 육군 원수 중 누구도 적의 포로가 된 적은 없다”라고 합니다. 자X 하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래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9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소련군에 항복합니다. 거기서 고국으로 돌아간 인원은 수천명밖에 안되지만 파울루스가 이 정도 선택을 한 것이라면 독일군도 극한의 상황까지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이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의 전체 전쟁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수렁에 빠집니다. 그리고 독일 국내가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자기네가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본다면 독일군의 무적 신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전까지 독일군은 1번도 진적이 없었는데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연합군이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스탈린 그라드 전투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전쟁은 지도자만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일개 병사는 그냥 죽기 쉬운데요. 이런 전쟁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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