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한국 최대의 좌우 합작단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민회하고 신간회는 다른 조직입니다. 신민회는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독립운동 단체이고요. 신간회는 한국 최초로 민족주의 노선 분들과 사회주의 분들이 힘을 합해 만든 단체입니다. 신민회는 독립운동을 직접 하는지라 지하 조직이었고요. 신간회는 일본도 인정한 양지에서 일하는 공식 단체였습니다. 위의 그림은 신간회가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1920년대~1930년대는 두가지 항일운동 방향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인데요.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이나 그 안에서도 분파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끄느냐,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 등에서 나뉘는데요. 민족주의 일파하고 사회주의 계열하고 합동전선을 만들기로 하는데요. 그러면서 등장한 ..
조선 의용대 특수전 부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조선 의용대는 김원봉이 1938년 세운 항일무장군대입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한국인 부대입니다. 그 이전에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서 항일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요. 의열단은 폭탄으로 일본 세력을 폭파하는 활동을 주로 했습니다. 의열단의 대표적 사건으로는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김상옥)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나석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황포군관학교 1기 입학생 모습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인데 당시 중국의 최고 엘리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의열단은 이렇게 초기에는 소수정예로 일본 세력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하는데요. 하다 보니까 그 한계를 느낍니다. 폭탄을 던져서 일본 사람을 죽여도 ..
암태도 소작쟁의 농민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암태도는 우리나라의 섬 이름입니다. 전라도에 있는 섬인데요. 신안 쪽에 있는 섬 중 제일 기름진 땅을 가진 섬입니다. 거기서 1923년 1년간 소작쟁의가 일어나는데요. 그것이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입니다. 소작인은 다른 사람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땅 주인(지주)과 나눠 갖는 사람을 뜻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건물주와 가게 사장님의 대립처럼 그 당시에 소작 농민과 지주간의 대립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암태도의 위치입니다. 소작인이 농사를 짓고 땅 주인과 상식선에 맞게 비율을 맞춰서 나눠 가지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요. 당시에 지주와 소작인과의 수확물 분배를 8대 2같이 너무 안 맞게 나눠 가졌습니다. 거기다가 소작인..
청산리 전투 영광의 순간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청산리 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치른 전투입니다. 1920년 10월 21일~26일 5박 6일 동안 10차례 전투를 벌이는데요. 거기서 독립군이 모두 대승을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홍범도 장군도 참전한 전투입니다. 청산리 전투는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를 한 전투입니다. 위의 빨간색 점이 청산리 지역입니다. 위의 지도가 청산리 지역을 확대해서 본 모습인데요. 저 전투들이 모두 청산리 전투에 속한 전투입니다. 저 전투들을 모두 독립군이 승리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하루에 사격 훈련 한 번만 해도 빡세고 하루가 다 가는데요. 저 때는 하루에 2번 정도 저런 전투들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한 부대가 아니라 ..
어린이날 유래 방정환 선생님이 만드셨다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도 방정환 선생님이 의미를 좋게 바꾸신 건데요. 기존에는 어린이라는 단어가 어리석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단어를 어린이에게도 사용했던 것이죠. 애녀석, 딸년, 어린놈, 아해놈, 애놈 같은 단어들의 의미와 비슷한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런 어린이란 단어를 ‘가능성을 지닌 앞선 존재’로 의미를 바꾸신 분이 바로 방정환 선생님입니다. 위의 사진이 방정환 선생님과 그의 필명들입니다. 저 정도로 글을 많이 쓰셨습니다. 필명이 많은 이유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와, 어린이라는 잡지에 글 쓰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자신이 여러 필명으로 여러 글을 쓰신 것입니다..
덕수궁 석조전 내부 모습을 살펴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덕수궁의 역사는 조선 시대 선조 대에 시작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는 피난을 가는데요. 그 후로 한양에 있던 궁이 다 불탑니다. 1593년에 한양으로 선조가 돌아왔는데 들어갈 궁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가 집안이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지은 저택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는데요. 그것이 덕수궁의 시작입니다.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습니다.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는데요.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황제에서 강제로 퇴위 됩니다. 그래서 태황제가 되는데요. 그렇게 고종이 마지막에 머물던 장소가 덕수궁입니다. 위의 사진이 덕수궁 석조전의 외부모습입니다. 대한제국의 자주 문명국가 의지와 근대화 노력을 보여주고자 지은 건물입니다. 석조전은 1900..
관동 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 일대에 규모 7.8의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규모 6 이상 여진만 15차례 발생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45만여 개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10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됩니다. 전년도 국민총생산의 약 1/3 수준(현재가치 46조 원)이 손실되었습니다. 이 관동 대지진 발생 후 일본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든가, 건물에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퍼져 일본 사람들이 재일조선인 6,661명을 죽입니다. 이것이 관동 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입니다. 위의 지도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지역입니다. 도쿄 인근 지역을 관동지역이라고 하는데요. 관동지역과 야마나시현, 시즈오카현에서 관동 대지진이 발..
상해 임시정부 시절 국민 대표 회의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일제식민지 시기 독립운동가들은 외교, 군사, 계몽주의 노선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국제 정치는 선의, 정의, 당위성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해관계 기준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외교로 독립을 거머쥐려는 노력에 대한 절망을 독립운동가들이 느꼈는데요. 이런 이유로 독립운동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알기 위해 대대적인 회의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 시절 치른 국민 대표 회의입니다. 시험문제로도 잘 나오고 쉽게 외우는 방법도 제공할 테니 끝까지 한번 봐보시기 바랍니다. 1923년 1월 3일 상해 임시정부 의 국민 대표 회의를 개최합니다. 안창호가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전 국민의 의견을 결집해..
대한민국 명칭유래 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호가 대한민국인 이유는 임시정부 시절 이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여서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왜 대한민국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알아보면 대한민국 명칭유래를 알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퍼지면서 독립운동을 컨트롤 타워 할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인 독립운동이었지만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 산발적으로 하는 방식의 독립운동이었기에 중앙에서 통제할 기관의 필요성을 독립운동가들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3.1운동 후에 이곳저곳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3.1운동 후에 생긴 임시정부로는 중요한 곳이 세 군데 유령(?) 임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말 그대로 과거에는 교도소였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1920년 감옥 안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곳으로 유명합니다. 과거에는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가분들이 많이 수감되었고요. 현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민주주의 운동가분들을 많이 수감했었습니다. 이런 서대문형무소를 역사관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1908년 서대문형무소가 처음 개소할 때의 모습입니다. 면적이 약 13,000m²(3,934평) 이었습니다. 수용인원은 500입니다. 그 후 1935년에 증축을 하는데요. 그래서 면적이 약 54,500m²(16,500평)가 됩니다. 수용인원은 2,500명이 됩니다. 증축된 사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잡..
박용만 독립운동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두산 그룹의 박용만 회장이 아니라 박용만 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 그룹 회장 하고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은 저마다의 독립운동 노선이 있었는데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외교 노선, 군사 노선, 계몽 노선입니다. 3개 노선 모두 노력하며 같이 발전을 시키는 게 제일 좋았는데요. 당시 좀 모자란 사람은 자기의 노선만이 맞는 길이고 다른 사람의 노선은 틀린 길이라 믿고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인데요. 진짜 이승만은 쌍욕을 수십 번 해도 모자란 인물입니다. 어쨌든 3가지 독립운동 노선 중 군사 노선으로 노력을 한 인물이 바로 박용만 독립운동가입니다. 위의 사진이 박용만 독립운동가십니다. 박용만은 어렸을..
김마리아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김마리아는 1892년생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나란히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도 하신 분입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김마리아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 한국 여성분들의 독립운동 관련 활약도 컸습니다. 3.1운동도 여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인데요. 실제로 현재 발굴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체 독립운동가의 2% 수준입니다. 남성들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친구인 여성들의 권익을 위하여 김마리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
김 알렉산드라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독립운동가인데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여자인 데다 사회주의자라 한국에서는 이름을 처음 듣는 분도 많으실 텐데요.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이 여러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진영도 있고 사회주의 진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민주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독립을 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연합해서 같이 활동도 많이 하던 시기입니다. 위의 사진이 김 알렉산드라입니다. 김 알렉산드라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 김두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두서는 함경도 경흥 출신인데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민족대표 33인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규식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참석합니다. 근데 현실적으로 세계 정상들이 김규식 선생의 말을 제대로 들을 리 없으니까 김규식 선생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 국내에서 대규모로 조선 독립을 선언하기로 합니다. 이런 내용이 여운형 선생이 만든 ‘신한 청년단’을 통해 국내나 국외에 퍼집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안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이 먼저 2.8 독립 선언을 하고요. 이것에 영향을 받아 3.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29명 계셨는데요. 나머지 4분은 바쁘시거나 연락을 미리 못 받아서 참석을 못 하셨습니다. 3.1운동을 할 때 ‘독립 선언’을 할지 ‘독립 청원..
파리 강화 회의 와 3.1운동의 연결고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제1차 세계대전 종전협정을 체결합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앞으로 세계평화 질서를 어떻게 할지 논의를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파리 강회 회의입니다. 1919년~1920년까지 합니다. 5개월은 기본 협의를 하고 그다음 패전국 한나라씩 따로 회담을 합니다. 주요 의제는 전쟁 책임 배상 문제, 영토 조정 및 확정 문제, 앞으로의 평화 유지책 들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김규식 선생 젊었을 때 사진입니다. 파리 강화 회의를 주도했던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일본입니다. 참여한 나라는 총 27개국입니다. 국제적 관심사는 주요 안건 중에 식민지 독립에 대해 ..
무단통치 시기 특징 3가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무단통치는 1910년 한일합방 된 후 3.1운동 이전인 1919년까지의 일본이 대한민국을 통치한 방식입니다. 헌병 경찰통치라고도 하는데요. 군인인 헌병을 이용해 조선의 국민을 군인 다루듯이 다룬 통치방식입니다. 위의 사진은 일본이 사용한 태형 대입니다. 저기에 엎드리게 한 후 팔과 다리를 결박하고 엉덩잇살을 노출한 후 태형을 하였습니다. 무단통치 시기 특징 1. 태형 태형은 매로 때리는 형벌입니다. 대표적인 신체형으로 전근대적인 처벌입니다. 근대국가로 오면서 대부분 폐지된 법률입니다. 조선에서도 태형은 군대에서만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거의 태형을 하지 않고, 태형을 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벌금제처럼 돈으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요. 일본은..
대한 광복회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대한 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데요. 박상진 의사가 만들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광복회인 1965년에 조직한 독립유공자와 유족 후손이 만든 보훈단체와는 다른 곳입니다. 위의 분이 박상진 의사이십니다. 박상진의 아버지인 박시규는 고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요. 승정원 승지(현재 청와대 비서관급)를 하셨습니다. 큰아버지인 박시룡한테 나중에 박상진 의사가 양자로 가는데요. 박시룡은 홍문관 교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경주 최부자 집은 12대가 만석꾼이던 집안인데요. 그 집안의 모토가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였습니다. 잘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박상진 의사의 아내가 경주 최부자 집 딸이..
재외동포 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은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외국에 갔던 사람을 멸시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도 멸시하고, 고려인들도 나라 밖 사람이라 같은 민족으로 잘 보지 않습니다. 조선족들은 범죄를 자주 저지른다고 역시 멸시하지요. 범죄는 국내인도 저지르는 사항입니다. 이런 안 좋은 사고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서는 일본 식민지하의 민족이 밤이던 시절 재외동포들이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재외동포 의 독립운동 1. 철혈광복단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지역의 무장독립단체입니다. 15만 원 탈취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보면 정우..
신흥무관학교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시에서 의열단이 조직됩니다. 의열단은 무장 독립운동가 단체인데요. 처음에 13명이 모여 조직한 것입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날리고, 일본 천왕한테도 폭탄을 날리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일으킨 무장독립운동 단체입니다. 이 의열단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8~9명 있었습니다. 의열단의 단장이던 김원봉도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위의 분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 사진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한 학교인데요. 신흥무관학교 -> 광복군 -> 대한민국 국군의 계보가 생긴 것입니다. 1907년에 신민회라는 항일 비밀결사조직이 서울에서 결성되는데요. 신민회는 독립운동단체 중 최초로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운동을 같이 한 단체입..
105인 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05인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만의 주장입니다.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우리나라의 서북지방을 순찰하는데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하고자 간 것입니다. 이를 독립운동가들이 미리 알고 1910년 12월 27일에 선천 역에서 독립운동가 150여 명이 총 70정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다가 내부 고발자에 의해 발각이 되어서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판정받았다고 해 105인 사건입니다. 위의 사람이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입니다. 사람 1명 암살하는데 역 하나라는 작은 공간에 150여 명이 바글바글 모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캄캄한 상황에 좌절만 한 게 아니라 그 해결책을 모색하셨습니다. 일본 식민통치의 해결책으로 모색한 방식은 계몽 운동(민족의 실력 향상), 의병 운동(무장 투쟁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있습니다. 3.1운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이나 여러 가지 운동을 하려면 국가적인 구심점이 있어야겠다는 것을 조상님들이 뼈저리게 느끼셨는데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하려고 만든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위의 사진은 대동단결선언문을 만드신 분들입니다. 저 중에서 신규식 선생님 주도로 만들었습니다. 아래는 1910년 7월 6일 신한민보 논설에 나왔던 글입니다. 대한인국민회라는 미국 교포들이 만든 ..
기미 독립선언서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문을 파고다 공원에서 낭독하며 3.1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낭독한 독립 선언서가 바로 기미 독립선언서입니다. 기미 독립서는 한 학생이 낭독하며, 종이에 인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뿌려졌습니다. 위의 분이 육당 최남선(1890~1957) 이십니다. 아래는 기미 독립선언서 내용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분명히 밝히며 (중략)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하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거하여 독립은 선언하는 것이며 (중략) 민족의 영원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이를 제기하는 것이니 (중략) 이는 하늘의..
한일 병합 조약 을 살펴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0년 한일 병합이 일어납니다. 그 후 조약 서를 발표하는데요. 그것이 한일 병합 조약입니다. 공식적인 이름은 한국 병합 조약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일본의 지배로 합친다는 말을 병합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병합은 당시 잘 사용 안 하던 단어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란 것을 내포하며, 합친다는 표현으로 병합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맞는 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아니라 한일 강제 병합 조약 정도로 적어야 맞는 단어입니다. 아래는 한국 강제병합 추진 부서인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이 남긴 문서 발췌본입니다. “나는 한국이 완전히 멸망하여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음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그 어..
ymca 야구단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ymca 야구단은 한국 최초의 야구단입니다.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1903년 미군이 하는 낯선 공놀이에 조선 청년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입니다. 위의 사진이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 모습입니다. 필립 질레트는 미국에서 장비를 들여와 조선 청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년 뒤 황성 ymca 야구단을 창립합니다. 위의 사진이 1904년 창립한 황성 ymca 야구단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입니다. 위의 사진은 황성 ymca 야구단 모습입니다. 대한제국이 세계열강들의 각충장이던 시기 온 장안은 낯선 서양 스포츠 야구의 열기에 빠져듭니다. 야구를 하려면 공, 방망이, 글러브,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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